수 평

전주곡
식은 땀이 줄줄 흘러 눈에 들어갔지만 온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저벅저벅......”
뒤에서는 경쾌한 전주곡이 흐르고 있었지만 귀에는 딱딱한 발자국 소리만이 요란했다.
“저...... 저...... 벅...... 버......”
불과 몇 발자국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아득한 먼 산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메아리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저......삑, 저......삑”
다가오던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짝재기 불협화음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경쾌하게 흘러나오던 전주곡이 멎었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가 코앞에서 진동했다.
“대가리라니!”
주군의 손에 쥐어 진 훈장에 반사된 햇빛이 눈에 비췄지만 훈장을 내려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말로 훌륭한 과업을 이루었습니다!”
가슴에 훈장의 무게가 느껴진 순간, 천하를 다 가졌다는 뿌듯함에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하하하!”
주군이 흡족한 듯 웃음을 터뜨리자 긴장되었던 몸이 눈 녹듯 느슨해졌다.
‘이렇게 가까이 영접할 기회가 다시는 없을 텐데......’
주군이 자리로 돌아가 앉자 눈물에 가려져 주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사실에 후회가 물밀 듯 들이닥쳤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이윽고, 합창단이 주군 찬양가를 웅장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주군은 만족한 모습으로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고 있었지만, 주군 옆에는 불만에 가득 찬 모습으로 앉아 있는 마님의 모습이 보였다.
사냥
“찰칵!”
진 대표의 얼굴에 섬광이 터졌다.
“도돈냄새 요구하려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요 대리가 진 대표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우리를 납치한 이유가 뭐요? 왜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 거요?”
진 대표는 요 대리를 토닥거린 후, 새파랗게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내가 왜 설명해야 하는데?”
시종일관 진 대표의 질문을 무시하던 납치범이 퉁명스럽게 쏘아댄다.
“어엉뚱한 자를 자잘못 나납치했을 수도......”
요 대리가 중얼거렸지만 납치범은 관심 없다는 듯 전화기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따지면서 어떻게 세뇌를 당했대?”
이윽고, 납치범이 기지개를 피며 가소롭다는 듯 혼잣말을 한다.
“세뇌?”
진 대표는 놀라 외마디를 질렀지만, 납치범은 아랑곳 않고 전화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소?”
두려움에 가득 차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요 대리를 진 대표가 내려다 본다. 색시를 찾는다는 납치범을 만나도록 주선한 자가 요 대리였기 때문이다.
“교포이기는 한 거에요?”
요 대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감독이니 사진 기자니 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소?”
납치범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류 사업을 가업으로 물려받았다는 것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돌처럼 굳어있는 납치범을 보면서도 진 대표는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몸 값을 누구한테 요구한 거죠?”
“나한테 알려주면 협조를 할 텐데!”
“지금 몇 시인가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침묵하는 납치범을 보면서 진 대표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요 대리가 분명히 신분을 확인했다고 했는데...... 신분을 속일 수 있을 정도면 분명히 배후에 거대 집단이 있어!’
요 대리는 여전히 아이처럼 진 대표의 등 뒤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내 사진만 찍던데...... 내가 목표라면 요 대리는 풀어 주시요. 아직 결혼도 못했어요.”
그때, 납치범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납치범은 기다렸다는 듯 급히 문자를 확인했다.
“아악!”
납치범이 다가오자 요 대리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진 대표의 겨드랑이로 파고든다.
“잠깐, 잠깐! 원하는 것이 뭐예요? 장기 판매요? 받는 대가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납치범의 손에 쥐어 진 칼을 보고 진 대표는 다급해졌다. 하지만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거참, 입만 살아서...... 하긴, 그러니 모두 속아 넘어갔지!”
납치범이 입을 열자 진 대표는 고마울 정도로 반가웠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속였다는 겁니까?”
하지만 납치범은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가르쳐 주시요? 내가 왜 여기...... 당신은 누구...... 무슨 권리로 나를......”
“거짓 비방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를 도우면서......”
진 대표의 입에서 질문이 쏟아지자, 멸시하는 눈초리로 응시하던 납치범이 갑자기 화가 난 듯 말을 내뱉는다.
“언젠가 벌받을 것이라는 것도 몰랐어?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
“뭐라?”
드디어 납치 된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진 대표는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신이 똑바로 박혔으면 돌아가 반성하라고 조언했을 터......”
납치범은 기분이 상했다는 듯 험악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요? 난 매국노를 도운 적이 없어요! 나는 매국노를 증오합니다! 뭔가 잘못됐어요! 분명 잘못 납치했어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요! 정말 실수하는 겁니다!”
오류가 있었다는 확신이 들자 진 대표의 당황한 얼굴에 희망의 빛이 비추었다.
“우리 정보가 그렇게 허술한 줄 알아? 좀 전에 최종 확인 했어!”
납치범이 진 대표에게 다가간다.
“너 같은 기생충은 사라져야 해!”
“우리 말로 해결합......”
납치범은 진 대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윽!”
진 대표가 충격에 빠진 듯 입을 벌린 채 아래를 내려다본다. 납치범의 손이 보이자 진 대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납치범과 요 대리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 이내 요 대리의 무릎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아아무 마말도 안 하겠습니다. 사살려주세요!”
기겁을 한 요 대리가 진 대표의 몸을 매몰차게 밀쳐내고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저저도 워원래 지진 대표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마맞아요. 진 대대표는 괜히 여영웅심 가지고 자잘난 척......”
납치범은 듣는 둥 마는 둥 쓰러져있는 진 대표의 목을 손으로 짚고 있다.
“지진 대표가 가감춰둔 도돈냄새 위위치를 가가르쳐 드릴께요! 펴평생 거걱정 없이 사사실 수......”
애걸하는 요 대리의 앉은 자리가 흥건히 젖고 있다.
“둘이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됐소?”
요 대리가 넋이 나간 듯 계속 중얼거리자, 납치범이 어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치칠, 아아니, 파팔녀년......”
요 대리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기본이 다른데도 오래 버텼어!”
겁에 질린 요 대리에게 납치범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명共鳴이란 거 알아요?”
일어서는 납치범을 올려다보며 요 대리는 아이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불쌍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유진동수가 같은 주파수의 소리를 만나면 절로 울리는 현상!”
요 대리는 최대한으로 순진한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저자가 당신 풀어주라고 부탁하던 거 기억나요?”
납치범은 요 대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최측근을 제일 조심하라더니...... 그렇게 오래도록 같이 일했어도 이기적인 것은 여전히 이기적...... 기본 파장이 다르니 공명이 일어날 수 없지......”
요 대리는 납치범이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는 진 대표의 말이 귓속에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저는 워원래 아안면 인식을 모못합니다! 서선천적 벼병이에요...... 모목숨만 사살려 주세요!”
요 대리는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진 대표와 단독으로 만나겠다고 요청했는데......”
요 대리는 갑부와 인연을 만들어놓으려는 속셈으로 진 대표를 스스로 따라 나섰었다.
“그그게 지진 대표가 가같이 가가자고 고고집을......”
거기까지 말하고, 요 대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 납치범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다리에 힘이 빠져 고꾸라졌다.
“나 원 참......”
납치범은 요 대리가 기어가며 남기는 물 자국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아잉! 사살려주세요!”
그 때, 갑자기 아기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납치범이 경계를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뭐야?”
납치범은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요 대리에게 다가갔다.
“과업을 위태롭게 할 수 없어!”
“모목숨만 사살려주...... 사살려 주주...... 윽!”
망가진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던 요 대리가 바닥에 엎드려 미동도 없다. 이번에도 급소를 명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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