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순

대민
광고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자 광고 용지로 가득 찬 우편통이 보인다.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광고 용지가 가득했지만, 새로운 광고 용지는 매일 어떻게 해서든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재주도 좋아.’
오늘도 대민은 광고 용지를 꺼내 들었다. 광고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꽉 낑긴 모습이 답답해 숨을 쉴 여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한의사로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아 왔지만, 아직도 빽빽하게 꽉 짜여진 듯한 사회가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가구도 없이 휑한 거실의 창문 밖으로 현란하게 빛나는 밤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빛이 별빛인지 불빛인지 의아해하던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식탁에서 배를 집어 한입 물고는 음악을 틀었다. 한국 고전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마도 대민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국 고전 음악은 하루도 대민의 귀를 떠나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항상 한국 고전 음악을 틀어놓고 살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맑게 하여 인체의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비한 효력을 가진 것 같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를 않아.”
한국 고전 음악이 정신적 수양에 도움을 준다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아직도 귀에서 울리는 듯했다.
편지
‘새로운 식당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기는군.’
대민은 광고 용지를 버리면서 하루의 피곤을 해소하곤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필요 없는 광고 용지를 버리고 나면 뭔가 엉킨 것이 풀리고 오염된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도 분리수거 때 꿰나 무겁겠다!’
그때, 광고 용지에 끼어있는 편지 봉투가 눈에 띄였다. 가끔가다 편지 봉투에 넣어 보내는 보험이나 대출 광고와는 달리 겉봉만 얼찐 봐도 국제 우편임이 확실했다.
“Riptrenae Dassanayake. 립트레내 다싼나예이케. 립트르, 다싼... 얘이케.”
대민은 발음을 달리해가면서 겉봉에 적힌 보낸 이의 이름을 읽어보았다.
“누구지? 나틉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내 이름을 한글로 적었어.”
대민의 뇌리에 문득 오랜 친구들이 스쳐지나갔다.
“한세? 국만? 글씨체는 아닌데... 어린애가 쓴 것 같잖아... 이것들이 결혼을 하려나?”
대민은 편지가 결혼 청첩장이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세나 국만 그 어느 누구도 가정을 가진 아버지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도 됐을 텐데... 그 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어.’
대민은 호기심으로 부푼 마음에 편지봉투를 뜯었다. 하지만, 편지지를 보는 순간, 불안한 느낌이 순식간에 온몸을 타고 퍼졌다. 종이는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종이인 듯 누렇게 바래있었고, 글씨 색깔도 진했다가 흐렸다가 일률적이 아니었다.
“재를 찍어서 썼나, 진흙을 개어서 썼나?”
대민은 벌떡 일어서서 집에 있는 불이란 불은 다 키고 봉투 안을 살폈다. 대민이 꺼낸 편지지 한 장 외에 봉투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편지지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글씨를 만져보기도 하는 대민의 모습이 마치 실험실의 연구원 같다.
대민은 편지지에 초점을 맞추고 정지를 해 버렸다.
“실밥 터지지 않게 조심해!”
대민은 한 줄의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 밑에는 봉투에 적힌 나틉국 주소와는 다른 탈미리국 주소가 적혀있었다.
‘한세구나!’
출생
한세의 원래 이름은 립트르내포란테베닉투스 한세프리라마-센콤프페덱 다싼나예이케였다. 한세의 아버지는 탈미리국 부족장의 대를 이어서 젊은 나이에 부족장이 되었다. 하지만 젊은 부족장을 달갑지 않게 여긴 이웃 부족들은 침략을 하였고, 그것이 여러 부족들 간의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한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세의 부모는 살해당했고 한세의 유모는 한세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했다. 하지만, 피신 도중 유모는 상처를 입었고, 한세의 울음소리로 인해서 발견되었을 때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한세의 유모는 현지 의료 봉사단에서 간호를 받았고, 의료 봉사단에서 일하던 대민의 부모는 유모에게서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한세가 부족장의 아들임을, 그리고 한세의 마을과 부족장의 조상들에 대해 전해 듣게 되었다. 하지만, 유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인한 염증이 심해져 명을 달리하였다.
당시, 마침, 대민을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지라 대민의 어머니는 한세에게 모유를 먹이면서 대민과 같이 키웠다. 원래는 임시적이었지만, 대민의 어머니는 대민과 며칠 사이로 태어난 한세에게 정이 들었고, 한세를 떠나보낼 수 없어 입양하기로 결정한 후, 아기의 이름 중 한국 이름에 가장 가까운 가운데 이름의 첫머리를 따서 한세라고 불렀다. 이후, 대민과 한세는 마치 쌍둥이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
실밥
대민과 한세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다. 부모님이 외지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하자, 부모님이 없는 틈을 타 대민과 한세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몰래 마을로 가서 실컷 돌아다녔다. 가끔가다 시장가는 어른을 따라서 시내 구경을 나가기는 했지만 보호자 없이 거리를 활보하기는 처음이었다.
온몸이 긁히기도 하고,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하고, 마을에서 먹은 음식 때문에 배탈이 나 앓아눕기도 하고, 심지어 나쁜 사람들한테 돈을 뺏기고 얻어맞기도 했다. 그래도 대민과 한세는 여전히 자신들의 새로운 경험이 재밌다는 듯이 깔깔대고 웃어대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어느 날, 다리를 꿰매서 쉬어야 하는 날도, 대민이 시내로 놀러가려 하자, 한세가 대민을 말렸다.
“야, 너 실밥 터지지 않게 조심해.”
이후, 한세와 대민은 몰래 해야 하는 일에는 실밥 얘기를 하면서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교감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민과 한세는 번화한 거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것은 대민과 한세에게는 눈을 뜨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대민과 한세는 시내에서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게 되었다. 환자들을 24시간 돌보는 의사들을 평생 목격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쾌락만을 위한 소비적인 생활은 의미도 목적도 없는 시간 낭비 같아 보였던 것이다. 이후, 대민과 한세는 책을 파기 시작했다.
“책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실제 경험하는 세계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각양각색이라서 지루해지지 않아.”
“흥미로운 경험을 하면서도 육체적으로 피곤해지거나 다치지 않아.”
안 그래도, 한세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대민과 둘이서 놀이를 하는 것을 더 선호하고 있던 차였다.
나이에 비해 깨달음이 빨랐던 대민과 한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문인들이 보는 책들을 아무런 문제없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시험을 위한 잡다한 정보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대신 필요한 지식만을 깊게 파고드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고 하더니.”
주위에 대민과 한세의 총명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놀이
“야, 그 길로 가면 어떻게?”
오늘도 한세와 대민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도개걸윷모, 맞잖아!”
한세는 고대 한국의 영향력이 동양 철학 성립에 컸었다는 내용을 읽은 이후, 한국의 전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너, 윷놀이에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는 거 알아?”
“어?”
“윷판의 중심은 북극성이고, 28점은 태양이 사계절 동안운행하는 길이야. 이렇게 가장 짧게 돌아오는 길은 해가 가장 짧은 동지, 이렇게 가장 멀게 돌아오는 길은 해가 가장 길게 비추게 되는 하지, 여기, 중간지점에서 돌아오는 길들은 춘분하고 추분이고. 기가 막히게 멋지지 않아?”
한세의 얼굴에는 깨달음의 기쁨이 가득했다.
“28점?”
“황도 28수 별자리 말야. 24절기로 변하면서 태양의 위치가 변하잖아.”
“입동 소설 그거?”
말이 끝나자마자 대민이 24절기 노래를 부른다.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한,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한세가 미소 짓는다.
“28점은 뭐야?”
“북현무 7수, 동청룡 7수, 남주작 7수, 서백호 7수해서 28!”
“7수?”
“북7수는 벽실위허여우두壁室危虛女牛斗, 동7수는 기미심방저항각箕尾心房氐亢角, 남7수는 진익장성유귀정軫翼張星柳鬼井, 서7수는 삼자필묘위루규參觜畢昴胃婁奎.”
대민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 듯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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