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三 자

아살순
보고
이른 아침, 아살순이 지하도시 건설의 진행 보고를 검토하고 있다.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 후, 건설에 진전이 없자, 이제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밤새 진행된 사항을 훑어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사전 조사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여태 이 상태야?”
아살순은 조급해졌다.
“그게, 저희도 황당해서, 설명이 안 되는 게, 레이저로 모든 광물 분석이 끝났고, 전산 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잭스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전문가란 전문가는 다 동원해.”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외국에서라도 동원해야할 것 아니야?”
“외국 학자들도 이미 동원해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해결책을 찾든지 만들든지, 이것을 성사 시키지 못하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만 알아둬.”
지하도시 건설 작업의 총책임자인 잭스가 진땀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말씀인데, 외국에 전문가가 한 명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빨리빨리 섭외를 하지 않고?”
“그게, 한국인이라서...”
“뭐야?”
짧은 탄성과 함께 아살순이 이를 꽉 깨물고 입을 굳게 다문다.
‘한국인이라면 소름이 끼쳐.’
아살순은 뒤로 돌아서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곰곰이 생각한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결심을 했다는 듯, 아살순이 고개를 들고 돌아선다.
“쓸모없는 것들! 아무리 학자라고 포장을 해주고 지원을 해줘도 세뇌 된 한국인 하나 따라잡지 못해? 그것들 돈 다 끊어 버려!”
“예! 그 한국 학자는?”
“거, 그럴 듯하게 띄워주고 슬쩍 얘기를 꺼내봐!”
“연구 지원금을 후원한다고 할까요?”
“아니, 돈 드는 거 말고.”
”그럼, 상을 준다고 할까요?”
“그래, 저번에도 세계적으로 이름난다고 우쭐해서 나라까지 팔아먹었잖아.”
“예, 알겠습니다.”
잭스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아살순이 덧붙인다.
“그 놈 입에서 우리 사업 얘기가 한 마디도 밖으로 못 나가게 해.”
“예. 격리조치 시키겠습니다.”
“필요 없어지면 어떻게 하는지 알지?”
“예,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아살순은 거울 앞에서 인간 모습으로 변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귀뒤, 목뒤, 손가락 사이, 모두 완벽해.”
아살순은 반인반귀半人半鬼, 즉, 반은 인간이고 반은 귀신인 인귀人鬼였다.
발화
아살순이 아침 식사를 기다리면서 티비를 보고 있다.
“긴급 들어온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인간 자연 발화 현상이 또 다시... 사건 현장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 몸에서 갑자기 자체적으로 불이 나서 타 죽은 자들의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기자의 모습이 흥분되어 있었다.
‘어떤 바보가 또 일을 저질렀어? 한심한 것들! 여태 백린白燐도 유지 못하면서 인간 행세는 하고 싶어서... 덜 떨어진 것들!’
인간들에게는 원인을 모르는 불가사의한 일로 남아 있었지만, 인귀들은 자연 발화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발화란 귀신이 상주하고 있는 인간의 육체에 있는 인燐을 적절하게 유지하지 못했을 때,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여 육체에 불이 나는 현상으로, 인귀들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육체는 불타더라도 몸에 상주하던 귀신은 다른 육체로 이동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단지, 이를 알지 못하고 신기하게 여기는 인간들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인귀들의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제
오래 전, 인간 세상에 처음 나오기 시작하면서, 귀신들은 인을 이용하여 천하의 오제五帝였던 백제白帝, 황제黃帝, 흑제黑帝, 적제赤帝, 청제靑帝를 모방하였다. 인에는 하얀색의 백린, 황색의 황린, 검은 색의 흑린, 붉은색의 적린, 청색 또는 보라색의 자린이 있었고, 이들의 색깔에 따라서 인귀들의 피부 색깔도 정해졌기 때문이다.
인은 옛부터 양기陽氣, 즉 밝고 따듯한 기운을 주는 원소로 알려져 있었다. 인의 영어 단어phosphorus가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phosphoros에서 파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농민들은 인성분이 많은 퇴비를 사용해야 건강한 농작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장인들은 인이 들어간 무기가 더 강력하고 날카로우며 오래 유지된다고 믿었다. 가구를 만드는 장인들은 인이 들어간 가구가 집안에 기를 불어 넣어 운을 높인다고 믿었고, 공인들은 인이 들어간 제품이 보다 맑고 중후하고 오래도록 머무는 듣기 좋은 소리의 악기를 만든다고 알고 있었다.
인은 음기로 가득 찬 귀신들에게 양기를 주어 인간으로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 원소였던 것이다. 한자 인燐의 뜻이 도깨비불인 이유도, 인이 애당초 사람 인人과 동음을 가지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백린
이 중, 귀신들은 특히 금기金氣를 주는 백린을 선호하였다. 내공이 부족하여 기氣를 충분히 키우지 못했던 귀신들은 인간 행세를 하기 위해서 금金의 기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귀들은 세계 곳곳에서 금을 모아들이는 사업을 펼쳤고, 여기서 금의 가치를 높게 보는 개념이 유래하였다.
하지만, 백린은 다른 인들에 비해서 불안정하여 산소와 쉽게 반응하였고 빛을 발하면서 불이 붙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것이 방송에서 떠드는 인간 자연 발화 현상이었다.
차별
후에, 인간사회로 진출한 인귀들은 자연 발화로 인해 정체가 탄로 날 것을 우려하여 권력을 장악해서 인간을 탄압하고, 교란 정책을 피면서 인간들을 우매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우리 정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끝장이야!”
그리하여, 권력이란 개념도 없이 평화롭게 살던 인간들의 평등 사회가 계급, 인종차별, 노예제도, 엘리트 제도 등에 의한 신분 사회로 변해버렸다.
“모든 인간의 생명이평등하다고? 생명이 평등할지는 몰라도 인간의 가치는 우리 귀신들에게 얼마나 이득이 되는 지에 따라 달라!”
다시 말해서, 어떤 의미에서건 위아래를 구분하는 우월과 열등,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배척 같은 개념은 인간사회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을 두려워했던 인귀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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