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초

산
진돌이
“진돌이, 잘한다!”
록아가 신출귀몰하게 숲속을 달려가는 진도개를 북돋으면서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산속이라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섰지만 록아는 그 사이를 헤치면서 조금의 긁힘도 없이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장하고 용맹한 모습이다.
진돌이의 모습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진돌이의 짓는 소리가 들렸다.
‘구석으로 몰았구나...’
록아가 달려가자 진돌이와 대치하고 있던 멧돼지가 갑자기 진돌이에게 달려들었다. 멧돼지가 잿빛의 보호색을 띠고 있어서 진돌이가 아니었으면 록아의 눈에는 뜨이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록아는 숨을 가다듬은 후 등에 매여 있던 화살을 뽑고는 진돌이를 불렀다. 진돌이가 멧돼지로부터 떨어지자, 록아는 활을 힘껏 당겼다. 멧돼지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진다. 그러자 진돌이가 다시 멧돼지에게 달려든다. 록아는 재빨리 달려가서 진돌이의 몸을 확인했다.
“진돌이 앉아! 상처는 없어... 잘했어...”
멧돼지는 땅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몇 달 째 록아의 집 밭에서 잘 먹어서 그런지 살이 포동포동 쪄있었지만 몸집이 작은 것으로 봐서 완전히 자란 성체는 아니었다.
록아는 밭을 해치는 짐승 때문에 오래도록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중, 오늘은 기어코 그 주범을 잡기로 결심하고 항상 쑥대밭이 되어있는 곳에 덫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덫을 쳐 놓은 반대편에서 어떤 짐승이 자리를 잡고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덫 쳐놓은 것을 아나?’
조심스럽게 짐승에게 다가가자 조그만 멧돼지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쑥대밭의 주범이 멧돼지였어? 멧돼지가 싫어한다는 풀을 주위에 심어놓았었는데... 후후... 멧돼지가 영리하다고 듣긴 했지만...’
록아는 할 수 없이 멧돼지를 통째로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록아가 한 발자국도 띄기 전에 멧돼지는 록아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도망갔다.
긴 추격전 끝에 밭을 오래도록 망쳐 온 주범을 드디어 잡기는 했지만 막상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멧돼지를 보니 마음이 안쓰러웠다. 록아는 어렸을 적부터 어떤 생명에게도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교육 받아왔기 때문이다.
“도망가지 않았으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다. 상처가 깊지 않아...”
집
“어머니, 저 왔어요.”
록아의 목소리에 반갑게 뛰어나온 모성이 록아가 메고 오는 멧돼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아앙! 형이 멧돼지를 죽였어!”
모성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 또... 살생하면 안 된다고 했지?”
모성을 따라 방에서 나오던 한 씨는 모성이 울지 않도록 다독이면서 록아를 나무란다.
“아냐, 죽지 않았어. 이것 봐, 숨 쉬잖아. 모성, 너가 잘 보살펴주면 돼.”
“정말? 그래, 내가 보살펴줄께.”
통곡을 할 것 같던 모성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활짝 폈다.
“이 멧돼지가 우리 밭농사를 망친 주범이예요.”
록아는 멧돼지를 우리 안에 내려놓으면서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아버지가 울타리를 만들고 계시잖니.”
“예... 돼지 상처에 약초를 좀 발라줘야겠어요.”
록아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한 씨도 아들들이 마을에서 동떨어진 산골에서도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는 것이 그냥 감사하기만 하여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얼른 씻고... 온 몸이 흙투성이야... 아버지께 저녁 드시라고 해라.”
“예.”
“진돌이 챙겨주는 것도 잊지 말고.”
“진돌이는 내가 챙겨줄까, 형?”
“할 수 있겠어?”
“응”
모성이 신났다는 듯이 진돌이에게 뛰어간다. 의좋게 지내는 두 아들을 보고 있는 한 씨는 뿌듯하기만 했다.
“진돌이가 공을 세웠으니 잘해줘.”
“알았어.”
“진돌이도 나이가 많아서 혹사시키면 안 된다.”
“염려마세요. 진돌이는 아직 힘이 넘쳐나요.”
산에서 신선한 공기를 숨쉬고 맑은 물을 마셔서 그런지 진돌이 역시 주인처럼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했다.
작업장
록아는 아버지의 작업장으로 가는 길목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비밀 장소에 먼저 들렀다. 깊이 땅 속을 파고 돌, 잎, 나무가지로 자연스럽게 가려놓고 자신이 귀중품으로 여기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제는 매일 한 번 씩 들러서 귀중품들이 훼손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였다.
‘별일 없어...’
록아는 멀리서 봐도 파헤쳐진 표시가 나지 않자 곧바로 아버지의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사냥으로 지쳐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하는 작업장은 집의 뒷편에 떨어져 자리하고 있었다. 작업의 특징상 위험할 수도 있는데다가 흐르는 물이 필요했고, 나무가 별로 없어서 하늘이 뚫려 보이는 곳이여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 멧돼지 잡았어요.”
“어, 그래....”
장 씨가 록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본다.
“이게 뭐예요?”
“태양을 이용할 기구야.”
“그게 뭔데요?”
“흠... 쉽게 말하면 힘들게 끌지 않아도 수레를 굴릴 수 있는 기구지...”
록아는 아직 그런 획기적인 발명품들이 머리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럼 울타리는 언제 되요?”
“아, 그거, 조만간...”
장 씨는 태양열을 이용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태양열을 변환시키는 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녁 드시래요.”
“벌써 저녁때가 됐나? 그래, 그러자꾸나.”
아버지와 작업장을 나서는 록아는 옆에서 다리를 저는 듯 엉거주춤 걸어가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마을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왕의 총애를 받던 학자였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에는, 아버지에게 뭔가 남다른 신비한 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록아가 마을에서 듣는 얘기들은 흥미진진했다.
마을
어느 날, 록아는 마을에 내려갔다가 사람들이 웅성웅성 속삭이고 있는 것을 들었다. 새 왕조가 들어선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조정에서는 여전히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왕족에게만 이로운 편파적인 정치를 해나가고 있어서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왕족들이 추는 춤 장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단과 완전히 달라... 아유, 정신 사나와...”
“하늘의 장단 말고 또 무슨 장단이 있다고 저렇게 난사스럽게 춤을 추는 건지...”
얼마 전, 조정에서 새로운 언어의 올바른 발음법인 국축성법國縮聲法이라는 것을 공포하고 강요하기 시작한 후에는 더욱 더 백성들의 불평이 커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단군 시대부터 몇 천 년이 넘도록 이미 가림다 문자를 사용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혼돈만 주게, 말하는 것 가지고...”
“평화롭게 하늘을 섬길 생각은 안하고 지네들 편하게 살 생각만 해서 그랴...”
”그러게... 하늘이 노할 것이구만...”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피비린내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에는, 새로 왕위에 오른 왕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권을 노리는 전왕의 형제들 간에 싸움이 벌어져서 쫓아내고 쫓겨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어린왕은 쫓겨났었다. 하지만, 쫓겨난 어린 왕을 다시 복원시키고자 했던 신하들 때문에 왕족들은 물론 신하들도 가차 없이 죽음을 당했고, 그래서 조정은 한 때 피바다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설화를 듣는 것 같아... 그것도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왕족들의 됨됨이가...’
항상 우주의 순리를 따라서 탐욕심을 버리고 살생을 금하며, 업보를 인식하면서 하늘을 경외하라고 교육받아 온 록아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들이었다.
‘전생에 지었던 죄업을 씻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오히려 못났던 전생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적나라하게 자랑이라도 하듯 반복하고 있어... 남의 흉을 보고, 남을 해치고... 결국 자신이 못났음을 스스로 들춰내는 꼴이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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