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지 경

꼴레이
신념
옛날, 한 나라에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을 태자가 있었다. 태자는 선천적으로 정이 많아 배려심이 깊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철학에 심취하여 심오한 천상지식을 겸비하면서,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우주진실을 탐구했으며, 활쏘기, 서예, 거문고 연주등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느 날부터는 권력구조의 필요성에도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태자는 법 없이도 모두가 평화롭게 살던 옛날을 재현하고픈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이승에서의 삶이 죄업을 씻기 위해 주어진 허상에 불과하다면, 우주는 모든 생명체의 임시적인 집이고,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왜, 이 세상의 권력에 눈이 멀어서 다른 사람위에 군림할 생각을 할까요?”
“흐흠... 태자님은 깨달음이 빨라 이상적인 개념을 손쉽게 이해하는 반면 현실 경험이 부족하여 현실과 이상 사이에 많은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십니다...”
“...”
“맑은 물을 담은 항아리에 독이 한 방울 떨어졌을 때, 그 한 방울이 떨어진 곳을 덜어낸다고 해도 항아리 전체의 물은 이미 독이 된 후라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항아리의 물을 모두 쏟아버리고 안을 깨끗하게 닦은 후에 새로운 물을 받아야 다시 맑은 물이 되는 것처럼, 순수함은 한 번 잃으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한, 다시는 순수함으로 돌아가기 힘듭니다. 다시 말해서, 오염은 한 번 시작하면 가속이 붙어서 자멸할 때까지 계속 번지게 되어 있어요... 새롭게 시작하지 않아도 복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거대한 댓가가 따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염증부위는 곪아 터져야지만 회복이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인가요?”
“점차 몸으로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니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배움에 정진하십시요... 돌고 도는 윤회를 계속하는 우주원리 안에 있는 생명체로서는 우주순리대로 사는 것이 최상이죠...”
축제
10월 축제일이다. 나라에 이보다 더 큰 축제는 없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아들이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하기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날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풍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하늘을 기렸고, 성문은 활짝 개방되어 사방에서 사신들이 인사를 드리려고 조공을 가지고 찾아왔으며, 상인들은 물건을 팔려고 각지에서 앞을 다투어 성안으로 몰려들었고, 가면극을 하여 돈을 버는 유랑객들도 보였다.
특히, 올해의 10월 축제는 태자에게는 의미 있는 축제였다.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각양각색의 외모를 한 외국사절들을 접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희 서쪽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순박하고 착해서 임금님을 존경하듯이 서로를 배려하기 때문에 법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태자를 본 서쪽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 자랑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태자는 더욱 더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왜 권력의 위계질서가 필요할까? 내가 직접 사람들을 만나봐야 권력구조의 불필요성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 스승님도 내가 현실경험이 부족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신하들을 거느리고는 현실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을 거야...’
며칠 후, 조용한 틈을 타서, 태자는 혼자 말을 타고 몰래 성 밖으로 나갔다.
준마
난생 처음 성 밖으로 나와 본 태자는 말을 달려 서쪽 사신들이 왔다는 나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서쪽의 나라에 이르러보니,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태자가 상상하고 있던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태자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호기심을 떨쳐버리고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먼 곳에 거미 같은 모습이 보였다. 태자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거미는 짐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도 동요하지 않고, 옆에 바싹 다가와 자신을 덮은 그림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르신!”
태자가 몇 번을 불러보았지만, 노인은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귀가 먹으셨나 보다...’
태자는 말에서 내려 노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노인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이 태자를 흘깃 째려보았다. 태자는 노인의 무뚝뚝한 모습에 섬뜩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왜 거미 흉내를 내시나요?”
노인은 태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겉모습만 봐도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귀족집 자제라는 것이 명백했다.
‘쳇, 배부르니까 헛소리를 하고 있어...’
노인은 재수 없다는 듯이 태자의 발앞에 침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태자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대답 좀 해주시요!”
그래도 태자는 노인을 따라가면서 재촉했다. 모르면 주저 없이 겸손하게 묻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서슴지 않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노인은 투덜대듯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거미는 젠장... 그럼 쌩쌩 달리는, 뭐, 사슴 흉내라도 내라고? 쳇!”
하지만, 태자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예?”
태자의 놀라는 소리에, 노인은 몇 걸음을 더 가더니 수레를 멈추고 태자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눈빛이 마치 자신의 불행에 대한 모든 원망을 금방이라도 퍼부을 듯 한 기세였다. 태자는 등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부정적인 얼굴 모습은 평생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쳇, 눈을 두고 보지도 못하나?”
“예?”
”아, 주위를 한 번 둘러봐! 젠장!”
태자는 약간 높은 곳으로 올라가 먼 곳에 보이는 마을을 내려 보았다. 거미들이 많이 보였다.
“흉내? 쳇, 거미들 좋아하네... 다른 수 있어?”
노인은 짜증난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이마의 땀을 닦고는 발걸음을 다시 옮기고 있었다.
몇 발자국 가던 노인은 놀란 모습의 태자를 골리고 싶은 마음에 입을 열었다.
“거기서 말 타고 지나가다가는 당장 목숨을 잃을 것이요. 하하하!”
노인은 귀족이 자신의 거짓말에 속는다는 생각에 고소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태자는 그 말에 기겁을 했다.
“아니, 법이 있는데 어떻게...”
”뭐? 법이 하루 종일 바로 옆에서 밥 먹여 줘?”
“그럼 어떻게 하면 저 마을을 지날 수 있을까요?”
노인은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이 태자를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끌던 수레를 멈추고 태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 마을에 가서 정착하려는 것이요?”
“아닙니다.”
“마을에는 무슨 볼일이요?”
“그냥 지나가는 길입니다.”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태자에게 바싹 다가와 속삭이듯 말한다.
“이러면 내가 위험해지는데 말야... 마을에 꼭 가봐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으니 내가 양보하리다.”
어느 새 싸늘한 냉기는 사라지고, 간교한 미소가 얼굴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무슨?”
“내 수레와 당신의 말을 맞바꾸리다... 내 아들 같아서 도와주는 거야...”
“그럼, 어르신이 위험...”
“내 걱정은 마... 헤헤... 나를 모르는 사람은 마을에 아무도 없어... 젊은 양반이 오래오래 살아야지, 안 그래?”
“저 짐들은 다 어떻게?”
“그것도 걱정 마시요! 정 마음에 걸리면 우물 옆의 파란 대문 집에 내려놓으면 되지만, 안 그래도 상관없어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미 흉내를 내기 위해서 실었던 것들이거든... 하하하!”
”아,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 그럼, 그럼, 손님에게 친절해야지!”
“정말 감사합...”
노인의 친절함에 감동한 태자가 감사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인은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왕성한 힘으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순식간에 말에 올라타더니, 오르자마자 썡쌩 달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기운 없이 쩔쩔매면서 수레를 끌던 노인이라고는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태자는 노인의 반응이 뜻밖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물을 잔뜩 실은 낡은 수레를 끌면서 기쁜 마음에 콧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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